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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구경  

 

 

 

 

황거【黃裾】수령(守令)이 행차할 때 앞을 인도하며 갈도(喝道)하는 졸노(卒奴)배.

황건적【黃巾賊】후한(後漢) 때 장각(張角) 등을 말한다.

황견【黃絹】아름다운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때 위(魏) 나라의 무제(武帝)가 양수(楊脩)와 함께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다가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양수에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안다고 하자, 무제가 “경은 내가 알아낼 때까지 말하지 말라.” 하였다. 30리를 더 가서 무제가 알아내었다고 하면서 양수에게 딴 종이에 뜻을 쓰게 하였다. 양수가 쓰기를, “황견(黃絹)은 색사(色絲)로 절(絶) 자이고, 유부는 소녀(少女)로 묘(妙) 자이고, 외손은 여자(女子)로 호(好) 자이고, 제구는 수신(受辛)으로 사(辭) 자이니, 절묘호사(絶妙好辭)입니다.” 하였는데, 무제가 쓴 것도 양수와 같았다. 《世說新語 捷語》

황견묘【黃絹妙】절(絶)의 파자(破子) 은어(隱語)로, 조조(曹操)가 일찍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는데 양수(陽修)가 좇았다. 비 등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舊)란 8자가 쓰여 있거늘, 양수가 풀이하되, “황견(黃絹)은 색실이니 글자로 절(絶)자, 유부(幼婦)는 젊은 여자이니 글자로 묘(妙)자, 외손(外孫)은 딸의 아들이니 글자로 호(好)자, 제구(제舊)는 쓴 것을 받는 그릇이니 글자로 사(辭)자이니 이른바 절묘호사(絶妙好辭)란 말이다.” 하였다.

황견유부【黃絹幼婦】‘절묘(絶妙)’라는 두 글자의 은어(隱語)로,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때 위(魏) 나라의 무제(武帝)가 양수(楊脩)와 함께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다가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양수에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안다고 하자, 무제가 “경은 내가 알아 낼 때까지 말하지 말라.” 하였다. 30리를 더 가서 무제가 알아 내었다고 하면서 양수에게 딴 종이에 뜻을 쓰게 하였다. 양수가 말하기를, “황견(黃絹)은 색사(色絲)로 절(絶) 자이고, 유부는 소녀(少女)로 묘(妙) 자이고, 외손은 여자(女子)로 호(好) 자이고, 제구는 수신(受辛)으로 사(辭) 자이니, 절묘호사(絶妙好辭)입니다.” 하였는데, 무제가 쓴 것도 양수와 같았다. 그러자 무제가 “나의 재주가 경에게 못 미치는 것이 30리이다.” 하였다. 《世說新語 捷語》

황계【璜溪】반계(磻溪)의 이칭. 태공 망(太公望)이 이곳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황옥(璜玉)을 얻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컫는다.

황계【荒鷄】삼경(三更) 이전, 즉 새벽이 되기도 전에 우는 닭으로, 그 소리는 보통 악성(惡聲)이라고 하여 불길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졌다.

황계【黃鷄】진(晋)나라 조적(祖逖)이 밤에 유곤(劉琨)과 같이 자다가, 황계(荒雞)의 소리를 듣고 발로 유곤을 차서 일으키고 춤을 추면서,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 황계는 새벽이 되기 전에 일찍 우는 닭을 말하는데 황계가 울면 난리가 난다.” 하였으니, 이는 조적이 한 번 시세를 타서 공명을 세울 큰 뜻이 있는 것이었다.

황계백일세쟁영【黃雞白日歲崢嶸】백거이(白居易)의 시(詩)에, “황계는 새벽을 재촉하고, 백일은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재촉한다.[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하였다.

황계백일최【黃鷄白日催】백거이(白居易)의 ‘취가(醉歌)’에 나오는 “누런 닭은 새벽을 재촉하여 오전 두 시에 울고, 하얀 해는 해를 재촉하여 오후 여섯 시에 진다.[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白樂天詩後集 卷1》

황고산【黃孤山】황고산은 조선조 중종 때의 명필로 이름은 기로(耆老), 자는 태수(鮐叟), 본관은 덕산(德山), 고산은 그의 호다. 특히 초서를 잘 썼다.

황고집【黃固執】황고집은 평양인(平壤人) 황순승(黃順承)의 별명으로, 성품이 아주 강직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황고집이라 하였다. 어느 명절날[節日] 새벽에 말을 타고 성묘(省墓)하러 가다가 평양 보통문 밖에서 도적을 만나자 말[馬]을 주면서 “의복은 제사를 지내야 하므로 주지 못하겠다.” 하니, 도적이 황 고집인 줄을 알고 즉시 말을 돌려주고 달아났다고 한다. 《松岳集》

황곡【黃鵠】고니의 일종으로 한 번 날면 천리를 간다 한다.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황색을 띤 대조(大鳥)의 이름인데, 전하여 대재(大才)가 있는 사람에 비유한다.

황곡가【黃鵠歌】한 무제 때 강동왕(江東王) 건(建)의 딸 세군(細君)을 공주로 삼아 오손국(烏孫國)의 곤막(昆莫)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곤막이 늙은 데다 언어도 통하지 않자 공주가 비수(悲愁)에 젖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원컨대 황곡이 되어 고향에 돌아갔으면.[願爲黃鵠兮歸故鄕]”이라 하였다 한다. 《漢書 西域傳下 烏孫國》

황공로【黃公壚】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혜강(嵇康)과 완적(阮籍) 등과 청담(淸淡)을 하며 술을 먹었던 주점 이름이다. 세설(世說)에 “왕융(王戎)이 황공의 주로(酒壚)를 지나면서 객에게 이르기를 ‘내가 옛날에는 혜숙야(嵇叔夜)ㆍ완사종(阮嗣宗)과 함께 이 술집에서 실컷 취하며 즐겼는데, 이 두 사람이 죽은 뒤로는 이곳이 비록 가까우나 까마득하기가 산하(山河)가 막힌 것 같이 여겨진다.’고 하였다”. 하였다.

황공비략【黃公祕略】병법(兵法)에 능통했다는 말이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에게서 태공 병법(太公兵法)을 전수받아 한 고조(漢高祖)의 작전을 도왔던 고사가 있다. 《漢書 張良傳》

황공주로【黃公酒壚】죽림칠현(竹林七賢)인 왕융(王戎)과 혜강(嵆康), 완적(阮籍) 등이 질탕하게 마셔대던 술집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회상할 때 흔히 비유하는 표현이다. 혜강과 완적이 죽은 뒤 왕융이 상서령(尙書令) 신분으로 이곳을 지나가다가 옛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관직에 매인 자신의 처지를 탄식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傷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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