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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구경  

 

 

 

 

계인【鷄人】벼슬 이름. 춘관의 소속인데, 새벽이 되면 백관을 일깨워 일어나게 하는 직을 맡았다. 왕유(王維)의 시에 “붉은 관 쓴 계인이 새벽을 알린다.[絳幘鷄人報曉籌]" 하였다.

계인【鷄人】옛날 새벽을 알리는 벼슬아치이다. 계인은 닭을 관장하여 고기를 제공하고 대제사(大祭祀) 때에는 새벽을 알려 백관(百官)을 깨운다. 《周禮 春官 鷄人》

계인보효【鷄人報曉】당 나라 제도에 붉은 수건을 쓰고 닭의 모양을 한 사람이 새벽이 되면 크게 외쳐서 새벽을 알렸다.

계자【鷄子】계란. 달걀.

계자【季子】계자는 한(漢) 나라 왕충(王充)을 가리킨다. 매우 가난한 속에서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저서에만 몰두하여 논형(論衡)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계자【季子】전국시대 유세가(遊說家) 소진(蘇秦)을 가리킨다. 연(燕)ㆍ조(趙)ㆍ한(韓)ㆍ위(魏)ㆍ제(齊)ㆍ초(楚)등 여섯 나라에게 서로 동맹을 맺고 진(秦)나라를 대항하도록 유세하여 여섯 나라의 상인(相印)을 차고 종약(縱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계자【季子】춘추 시대 때 오(吳) 나라의 계찰(季札)을 가리킨다. 계찰은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작은 아들로 어질다는 명성이 있어서 수몽이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사양한 채 받지 않자 연릉(延陵)에다가 봉하였으므로 연릉계자(延陵季子)라 불리운다. 상국에 두루 조빙하면서 당시의 어진 사대부들과 사귀었으며, 노(魯) 나라에 조빙하면서 주(周) 나라의 음악을 보고는 열국(列國)의 치란 흥망을 알았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계자검【季子劍】계자는 춘추 시대 때 오(吳) 나라의 계찰(季札)로, 연릉(延陵)에 봉해졌으므로 연릉계자(延陵季子)라고도 불리는데, 상국(上國)에 두루 조빙하면서 당시의 어진 사대부들과 사귀었다. 일찍이 진(晉) 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서(徐) 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서 나라의 임금이 계자가 차고 있는 칼을 보고는 갖고 싶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진 나라의 사신이 함께 있었으므로 계자가 즉시 칼을 풀어 주지 못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주기로 마음먹었다. 계자가 진 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 나라를 다시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서 나라의 임금이 죽은 뒤였다. 이에 계자는 서 나라 임금의 무덤 앞에 있는 나무에다가 칼을 걸어 놓고 떠나갔다. 《新序 節士》

계자관악【季子觀樂】연릉(延陵)의 계자(季子)로 불렸던 춘추 시대 오(吳) 나라 계찰(季札)이다. 사신으로 상국(上國)을 역방하며 현사대부(賢士大夫)들과 교유하였는데, 노(魯) 나라에 가서 주(周) 나라의 음악을 듣고는 열국(列國)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을 정확히 알아맞히었다고 한다. 《史記 卷31》

계자관주동상국【季子觀周動上國】계자(季子)는 춘추 시대 오(吳) 나라의 계찰(季札)을 말한다. 상국을 역빙(歷聘)하여 현사대부(賢士大夫)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노(魯)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주(周) 나라 음악을 직접 보고서 열국(列國)의 치란과 흥망을 알고 주 나라가 왕이 된 소이연을 설파해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史記 卷31》

계자구【季子裘】계자는 전국 시대 소진(蘇秦)의 자. 소진이 처음 연횡설(連橫說)을 가지고 수차 진왕(秦王)을 설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써, 검은 갖옷은 다 해지고 노자인 황금 백 근(斤)도 다 떨어졌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戰國 秦策》

계자구【季子裘】청렴 결백함을 나타내는 말. 춘추(春秋) 시대 오(吳)의 계찰(季札)이 나가 놀다가 길가에 금이 흘려져 있는 것을 보고는, 오월(五月)에도 갖옷을 입고 다니는 피구공(被裘公)이라는 자를 보고 그 금을 주워가지라고 하자, 그가 버럭 화를 내며 말하기를, “왜 자기 자신은 처신을 고상하게 하면서 남은 그리 얕잡아보는가. 오월에 갖옷 입고 나뭇짐 지고 다니는 자가 금은 주워 무엇에 쓸 것인가.” 했다고 함. 《高士傳》

계자구폐【季子裘敝】계자는 전국(戰國) 시대 변사(辯士) 소진(蘇秦)의 자(字). 그는 진왕(秦王)을 설득하려고 진 나라에 갔으나 뜻을 얻지 못하고 돌아올 적에 검은 초피(貂皮) 갖옷이 모두 해졌다. 《史記 蘇秦傳》

계자귀래【季子歸來】계자는 전국 시대의 변사(辯士) 소진(蘇秦)의 자(字). 그가 소싯적에 가사는 돌보지 않고 놀러만 다니자, 가족들로부터 괄시를 받았다. 그 후 6국의 제후를 설득하여 합종책(合從策)에 성공, 6국의 재상이 되어 금의환향하였다. 《史記 卷六十九 蘇秦傳》

계자십자비【季子十字碑】오(吳) 나라 공자(公子) 계찰(季札)이 죽어서 연릉(延陵)에 장사하였는데, 공자(孔子)가 그 비(碑)에 제(題)한 “鳴呼有吳延陵季子之墓”를 두고 이른 것임. 《南畿志》

계자의【季子衣】나그네 길을 떠돌면서 곤경에 처하였다는 뜻이다. 계자는 전국 시대 때 유세객(遊說客)인 소진(蘇秦)을 가리킨다. 소진이 진(秦) 나라에 가서 벼슬을 구하면서 진왕에게 글을 열 번 올렸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진 나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입고 있는 갖옷은 다 떨어졌고, 얼굴빛은 검어 모습이 몹시 초췌하였다. 《戰國策 秦策1》

계자인추【季子引錐】이 말은 전국책(戰國策)에, “乃發書 陳篋數十 得太公陰符之謀 伏而誦之 簡練以爲揣摩 讀書欲睡 引錐自刺其股 血流至踵”이라고 보임.

계자전【季子田】전국시대 동주(東周) 낙양(洛陽) 사람으로 여섯 나라의 상인(相印)을 찼던 소진(蘇秦)이 “나에게 만약 낙양의 성곽 근처에 밭 두 뙈기만이라도 있었다면 어찌 여섯 나라의 상인을 찰 수 있었겠느냐.”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계자는 소진의 자이다. 《史記 卷六十九 蘇秦傳》

계자초구폐【季子貂裘敝】계자는 전국(戰國) 시대의 유세객(游說客) 소진(蘇秦)의 자. 소진이 맨 처음 연횡설(連橫說)을 가지고 진혜왕(秦惠王)을 설득하였는데, 열 번이나 상서(上書)를 했지만 진 혜왕이 끝내 그 말을 써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 소진은 객지에 나온 지 오래되어 검은 담비 갖옷이 다 해지고 여비인 황금 1백 근도 다 떨어졌었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戰國策正解 卷三 秦策》

계자한【季子恨】계자는 전국 시대 때 유세객(遊說客)인 소진(蘇秦)을 가리킨다. 소진이 진(秦) 나라에 가서 벼슬을 구하면서 진왕에게 글을 열 번 올렸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진 나라를 떠나 초췌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괄시하였다. 그 뒤에 다시 제(齊), 초(楚) 등 7국에 유세하여 합종(合從)하게 하고는 6국의 재상이 되자, 진 나라 군사들이 15년 동안 함곡관(函谷關)을 넘어오지 못하였다. 《戰國策 秦策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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