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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구경  

 

 

 

 

당래수능오헌면【儻來誰能傲軒冕】장자(莊子) 선성(繕性)의 “요즘 사람들은 관직[軒冕]을 얻고는 뜻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몸에 속한 것이지 성명(性命)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우연히 찾아와 몸에 잠깐 붙어 있는 것이다.[物之儻來寄也]”라는 구절을 원용(援用)한 것이다.

당래지사【當來之事】앞으로 마땅히 닥쳐올 일.

당로독비【當壚犢鼻】한(漢)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아내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목로집을 차리고서, 아내에게는 손님에게 술을 팔게 하고 자신은 쇠코잠뱅이를 입고 잡역(雜役)을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당릉【唐陵】당(唐)은 종묘 안의 큰 길을 뜻하는 말로, 왕릉 즉 선조의 능을 가리킨다.

당림【棠林】아가위나무 수풀, 곧 선정(善政)을 베푸는 곳.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남순(南巡)할 때 감당나무[甘棠] 아래에서 쉬어 머물기도 했다는 고사.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담편(甘棠篇)에서 나온 문자로, 김의랑(金議郞)이 방백(方伯)으로 나가는 것을 미화하여 이르는 말이다. 발사(茇舍)는 그때 소공이 임시로 집짓고 일을 보던 초막(草幕).

당망【曭莽】해가 빛이 없음.

당명황【唐明皇】당 현종(唐玄宗)의 별칭.

당무백도아【堂無伯道兒】뒤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을 말한다. 백도(伯道)는 진(晉) 나라 등유(鄧攸)의 자이다. 등유가 하동 태수(河東太守)로 있을 적에 석늑(石勒)의 난을 만나 자기 아들과 동생의 아들을 데리고 피난하였는데, 도중에 적을 만났다. 등유는 두 아이를 다 살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겨 자기의 아들은 버리고 동생의 아들만 살렸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의롭게 여기면서 슬퍼하여 “천도가 아는 것이 없어서 백도로 하여금 아들이 없게 했다.” 하였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당무후【唐武后】당 고종(唐高宗)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말한다. 고종이 죽자 자기 아들 중종(中宗)을 세웠는데 마음에 맞지 않았으므로 폐위시키고 둘째 아들 예종을 세웠다. 그러나 곧 폐위시키고 자신이 정권을 휘두르면서 국호(國號)를 주(周)라 고치고 요직(要職)에 친족을 앉혔으나, 뒤에 장간지(張柬之) 등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당반환제마【唐班煥制麻】당나라에서는 대관 임명장은 누른 마지(麻紙)를 썼다.

당발【棠茇】당발은 감당나무 아래에 있는 초막이란 말로, 주(周) 나라 때 감당나무 아래에서 어진 정사를 펼친 소공을 가리킨다. 주 나라 때 소공(召公)이 북연(北燕)에 봉해져서 감당나무 아래에서 어진 정사를 펼쳤는데, 소공이 죽은 뒤에 백성들이 소공을 그리워해 감당나무를 감히 베지 못하면서 감당지시(甘棠之詩)를 지어 기렸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당발【棠茇】당발은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머물러 쉬었던 감당(甘棠)나무를 말하는데,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의 “무성히 자란 감당나무, 자르거나 베지 말라. 우리 소백께서 쉬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당발기물전【棠茇期勿翦】시경(詩經)의 감당편(甘棠篇)은 소공(召公)이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에 백성에게 은혜가 있었으므로 가고 난 뒤에도 백성들이 그가 자주 쉬던 감당나무를 베지 말자는 노래이다.

당비【黨碑】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를 말한다.

당비거철【螳臂拒轍】자기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강적을 대항함이 마치 사마귀가 성난 팔로 수레바퀴를 막음과 같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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