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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구경  

 

 

 

 

 

영자【榮子】춘추(春秋) 때 송(宋) 나라의 현인.

영자비산석【寗子悲山石】요순(堯舜)의 시대를 만나지 못한 한스러움을 뜻한다. 춘추 시대 위(衛) 나라 영척(甯戚)이 소의 뿔을 두드리면서 노래 부르기를 “南山矸 白石爛 生不遭堯與舜禪 短袍單衣適至骭”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산(山)과 석(石)을 취하여 표현한 것이다. 《蒙求 中 寗戚扣角》

영자중소원단의【寗子中宵怨短衣】요순(堯舜)과 같은 시대를 희구하며 자신의 신세 타령을 하는 것이다. 춘추 시대 위(衛) 나라 영척(甯戚)이 한밤중에 소의 뿔을 치면서 “生不遭堯與舜禪 短布短衣適至骭”이라고 노래한 고사가 있다. 《蒙求 中 寗戚扣角》

영장【靈掌】즉 선인장(仙人掌)이다.

영장【迎將】영장은 사람을 맞고 보내는 것이다.

영장상대성【郢匠相待成】호적수(好敵手)인 동시에 뜻이 맞는 동지로서 함께 절차탁마해 나가기를 기대했었다는 말이다. 장주(莊周)가 평생 토론을 벌였던 혜시(惠施)의 묘소에 들러 그를 회고하며 인용했던 “운근성풍(運斤成風)”의 비유에서 나온 고사로서, 영인(郢人)의 코 끝에 살짝 흙덩이를 묻혀 놓고 장석(匠石)이 자귀를 휘둘러 흙덩어리만 떨어뜨리곤 할 때마다 영인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태연히 있었는데, 일단 영인이 죽고나자 장석이 그 기술을 일체 발휘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莊子 徐无鬼》

영재【鈴齋】영재는 곧 영각(鈴閣)으로, 지방장관이 관할하는 지역을 말한다.

영재【鈴齋】영재는 곧 영각(鈴閣)으로, 지방장관이 관할하는 지역을 말한다.

영재【泠齋】유득공(柳得恭)의 호. 조선 정조(正祖) 때 사가(四家) 중의 한 사람으로 규장각 검서(奎藏閣檢書)와 풍천부사(豐川府使)를 지냈으며 회고시(懷古詩)와 기행문(紀行文)을 잘 지었다.

영재【令宰】영재는 수령에 대한 경칭이다.

영제【禜祭】수해(水害)ㆍ한재(旱災)ㆍ여역(癘疫) 등을 물리치기 위하여 산천의 신에게 비는 제사.

영제【令製】태자가 지은 글을 말한다.

영조【靈照】부친의 뜻을 잘 이해하는 어린 딸을 말한다. 방 거사(龐居士)의 딸 영조가 장차 아비가 입멸(入滅)하려는 것을 알고 아비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자기가 먼저 그 자리에 올라앉아 합장(合掌)하고 세상을 떠난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襄州居士龐蘊》

영족【靈族】선인(仙人)의 무리들을 가리킴.

영존【令尊】살아 계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음.

영주【瀛洲】고부(古阜)의 고호임.

영주【榮趎】남영주(南榮趎). 경상초(庚桑楚)의 제자로서 도(道)를 듣기 위해 식량을 싸 지고 이레 낮 이레 밤을 걸어 노자(老子)가 있는 곳을 찾아갔음. 《莊子庚桑楚》

영주【瀛洲】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으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자란다고 한다. 제주도를 가리키기도 한다.

영주【瀛洲】영주(瀛洲)는 당 태종(唐太宗)이 설치한 문학관(文學館) 이름으로, 여기에 임명된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등 이른바 ‘십팔학사(十八學士)’를 당시에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영주에 올랐다[登瀛洲]’고 일컬었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02 褚亮傳》

영주【瀛洲】영주는 예문관(藝文館) 등의 청직(淸職)을 말함.

영주【瀛洲】지금의 하북성(河北省) 하간현(河間縣).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진 시황과 한 무제가 불사약을 구하러 사신을 보냈다는 가상적인 선경(仙境).

영주관【瀛洲關】당 태종(唐太宗)이 영주관을 짓고 천하의 현재를 이곳에 불러들여 예우(禮遇)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존모하여 등영주(登瀛洲)라 하였다. 《唐書 褚亮傳》

영주구【伶州鳩】주(周) 나라 경왕(景王)의 악관(樂官). 영주구(泠州鳩)라고도 함.

영주산【瀛洲山】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있고 새와 짐승이 모두 희며,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영주산【瀛洲山】한라산(漢拏山)을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이라고도 한다.

영주십팔【瀛洲十八】당 태종이 설치한 영주관(瀛洲館)에 뽑혀 들어간 열여덟 명의 학사(學士)를 말한다. 당 태종이 인재들을 모두 끌어모으고는 문학관(文學館)을 설치하여서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등 18명의 문관을 임명하여 학사로 삼았다. 그런 다음 이들을 돌아가면서 관중에 머물게 하고 한가한 날이면 그들과 더불어 정사를 논의하고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리고 또 염입본(閻立本)에게 명하여 화상(畫像)을 그리게 하고 저량(褚亮)에게 찬(贊)을 짓게 해서 이를 관 안에다가 걸고는 이들을 ‘십팔학사’라고 불렀는데 당시 사람들이 몹시 흠모하여 등영주(登瀛洲)라고 하였다. 《新唐書 褚亮傳》

영주지언【瀛州之彦】당 나라 태종(太宗)이 글 잘하는 18명의 학사(學士)를 모아서 우대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그들을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올랐다고 부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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